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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고백] 망각 속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열며

[문을 열며] "도서출판 아서시오(Éditions aSocio)"가 세상에 나옵니다 : 다⋯

마름질 2026. 9. 9. 21:24

지난 9월 6일부터 9일까지, 이재명 대통령이 마크롱 대통령의 초청으로 프랑스를 국빈방문했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하는 이 방문에서 두 정상은 생폴드방스에서 '뤼미에르 서밋'을 공동주재하고, 파리 엘리제궁에서 정상회담과 국빈만찬을 가졌다. AI, 우주, 원자력, 바이오테크 등 여러 분야의 협력이 논의되었고,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라는 표현도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 언론에서 이 방문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 예산안을 둘러싼 정치 위기, 총리 교체, 농업 위기 등 국내 뉴스가 지면을 뒤덮은 탓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1. 비대칭적인 투자

이 방문을 두고 프랑스와 한국이 들인 외교적·상징적 자원의 크기는 결코 대칭적이지 않았다. 한국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빈방문 전체 일정을 소화하고, 문화 서밋을 공동주재하며, 유럽과의 관계 다변화라는 국가적 과제를 이 하나의 방문에 투영했다. 반면 프랑스 쪽에서는 협력의 언어는 풍부했지만, 이를 자국 여론에 '설명'하려는 노력—신문 공동 기고, 각료들의 언론 노출, 구체적 수치가 담긴 발표—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핵보유국, 오랜 외교 네트워크라는 상징자본을 여전히 보유하고 있고, 한국이 이를 활용하려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전략이다. 문제는 그 반대급부다. 프랑스가 자국의 산업적 이해(원자력, 방산에서 한국과 실질적으로 경쟁하는 관계)를 관리하면서, 동시에 이 파트너십을 대외적으로는 우호적으로만 포장하고 있다면, 그것은 신뢰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2. 침묵이 하는 말

프랑스 사회에서 오래 생활해본 사람이라면 안다. 프랑스적 화법에서 '침묵'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무엇을 공식적으로 언급하고 무엇을 언급하지 않는가, 누구와의 관계를 대중적으로 서사화하고 누구와는 의전 수준에 머무르게 하는가—이것은 암묵적인 위계의 언어다. 이번 방문에 대한 프랑스 미디어의 침묵은 어쩌면 특별히 한국을 겨냥한 의도라기보다, 파트너를 서열화하는 오래된 문화적 반사작용에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의도와 무관하게, 그 효과는 받아들이는 쪽—이 경우 한국의 여론—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3. 신뢰는 의전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려면, 정상 간의 만찬과 공동성명을 넘어서는 것이 필요하다.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약속, 프랑스 국내 여론을 향한 설명 노력, 그리고 한국을 '경제협력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강국이자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언어—이런 것들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번 방문 역시 상징적 제스처의 축적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한국이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축을 넘어 유럽과의 관계를 다변화하려는 시도는 정당하고 시의적절하다. 다만 그 파트너 역시 같은 정도의 진정성과 존중을 보여줄 때에만, 이 관계는 양쪽 모두에게 지속 가능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클로드.ai와의 긴 토론 이후에 작성되었습니다. 뭔가 쎄~하다 느껴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저이고, 어쨌든 프랑스가 가진 힘과 실력, 그리고 상징 자본이 있으니.... 프랑스 쪽에서 한국을 왜 그렇게 대하는지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설명한 쪽은 클로드였습니다. 프랑스에 오래 산 만큼 프랑스 사회에 대한 애증을 가진 사람으로서, 프랑스의 이런 속셈을 들여다 보는 게 유쾌하지는 않지만... 프랑스에 오래 산 저보다 더 현실주의자, 실용주의자이신 제 한국인 지인 여러분들은 이런 글을 침착하게 읽어내시리라 믿으면서 공유해 봅니다.)

posted by 도서출판 아서시오